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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허먼 멜빌의 ‘모비딕’ 완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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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4-25 01:09:17 수정 : 2024-04-25 0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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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시절로 다시 돌아가… 고래 한 마리 가슴에 품어

“지나간 내 생애의 거센 파도여, 저 아득한 곳에서 밀려와 내 죽음의 높은 물결을 더욱 높게 일게 하라!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너와 끝까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의 한복판에서 너를 찌르고,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증오를 담아서 뱉어 주마.”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일생일대의 목표였던 모비딕과 대면한 선장 에이해브는, 고래가 바다 위로 솟구치자 이렇게 외치며 회심의 작살을 날린다. 무리한 항해를 말리는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충고를 뿌리치고 모비딕을 쫓아서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급기야 태평양으로 달려온 그가 아니었던가.

김용출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허먼 멜빌의 ‘모비딕’은 출간 직후에는 많이 팔리지도 않았고 평론가들로부터 호평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작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극적인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이제는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와 함께 미국 문학을 여는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 김석희 작가의 완역판(작가정신)이 10여년 만에 전면 개정된 것을 계기로 다시 완독할 기회를 가졌다. 어릴 적 아동문고판 ‘모비딕’을 읽고 멜빌의 또 다른 중편 ‘필경사 바틀비’도 읽었지만, 이상하게도 완역판 ‘모비딕’을 다 읽진 못했다. 2주일여 천천히 읽어 나가면서 ‘모비딕’의 세계와 함께, 이 책을 따라 상상의 세계로 나아간 한 소년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많은 책이 가지런히 꽂힌 책장 서너 개가 교실 벽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것은 신세계였다. 내륙의 고도 나주로 전학을 온 소년에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학급문고였다. 이전에 남해안 장흥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웅장했다. 까까머리 초등 5학년 소년은 금세 학급문고에 푹 빠져들었다. ‘삼국유사’, ‘열하일기’, ‘삼국지’, ‘서유기’, ‘오디세이아’, ‘돈키호테’, ‘플루타르크 영웅전’….

 

이때 소년의 영혼을 사로잡은 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모비딕’이었다. 드넓은 바다로 나가서 고래를 잡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거니와, 무엇보다도 선장의 광기 어린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별천지였다. 어떻게 자신의 목숨까지 잃어 가면서…. 그럼에도 책은 상상의 세계와 바다를 이어 주었고, ‘모비딕’ 자체가 어떤 너머의 세계로 자리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모비딕’의 세계로 돌아가진 못했다. 중고교 시절에는 제도권 학습에 내몰리며 문학이라거나 독서의 세계에서 추방당했고, 대학 시절 다시 책의 세계로 돌아왔지만 거센 민주주의의 열기 속에서 고전이 아닌 사회과학의 세계로 빠졌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몇 차례 기회가 있었지만 번번이 완독에는 실패했다.

 

이번에 다시 완독의 기회가 생기자 스터디카페를 시간제로 끊은 뒤 꾸준히 읽어 나갔다. 처음에는 역시 진도가 나가지 않았지만, 에이해브가 나온 뒤부터 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절정을 향할 때엔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어느 날 하루에 두 번이나 스터디카페로 달려갔다가 몸살이 나기도 했지만.

 

에이해브의 광기가 여전히 100% 해명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커다란 고래 한 마리를 가슴 한편에 품을 수 있게 됐다. 향유고래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혹시 지금 소년의 꿈에서, 아니 노인의 회한에서 헤엄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당신의 가슴에서도.

 

“갑자기 ‘고래가 물을 뿜는다!’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 불쌍한 선원들은 화들짝 놀라 당장 또 다른 고래와 싸우러 달려가서, 진저리 나는 그 일을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오! 친구들이여, 이것은 정말로 사람 죽이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김용출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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